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과장된 일화들 ==== 즉위식 때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는데 제대로 대처도 안했다던가, 피의 일요일에 평화로운 시위대를 이유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던가, 라스푸틴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들은 세간에 다소 과장된 경향이 있다. 제정 붕괴 이후 임시정부 조사위원회나 소련 학계에서도 거짓으로 판명했으나, 이쪽과 정보 공유가 적었던 다른 나라에서 부풀려져 정설처럼 굳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스푸틴이 있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황후의 여러 '친구' 중 한 명일 뿐이었음에도[* 소위 '라스푸틴 파벌'이라고 알려졌던 프로토포포프도 훗날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서 비슷하게 '''"라스푸틴은 그냥 황후의 친한 지인 중 한 명이었고 여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고와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였을 뿐이다."'''고 증언했다.] 당시의 혁명세력이나 반정부 야당들은 라스푸틴이 황제와 황후를 통해서 제국의 통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만들어 선동의 도구로서 사용하였다. 즉 그런 음모론과 선동이 나온 시점에서 라스푸틴을 손절하고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않은 황제와 황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두각시나 라스푸틴이 실세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실제로 저 음모론에서도 '''라스푸틴이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해서, 어떤 정책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라스푸틴의 충고라는 게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면 명확해진다. 1915년 4월 6일 라스푸틴은 황제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갈리치아]]로 가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갔다. 1915년 6월 17일 라스푸틴은 황제가 두마를 소집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으나 황제는 총리의 반대를 거부하면서까지 두마를 소집했다. 11월 15일 라스푸틴은 리가 근처에서 공세를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1915년 11월 15일, 29일 라스푸틴은 두마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두마 소집은 연기되었다. 정리하자면 라스푸틴의 충고가 실제로 이루어진 사례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이루어진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거나 다른 합당한 이유가 있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게다가 당대 주변인들의 회고록에서도 분명히 나온다. 스톨리핀이 니콜라이 2세에게 라스푸틴을 내칠 것을 충고했을 때, 니콜라이 2세는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만 황후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보다 열 명의 라스푸틴이 있는게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М. П. фон Бок, Воспоминания о моем отце П. А. Столыпине ([[모스크바|Москва]]: Современник, 1992), 209. 표트르 스톨리핀의 친딸이 남긴 회고록이다.] 즉 황후는 황태자의 병을 라스푸틴이 호전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그냥 니콜라이 2세 본인에게는 당시 시점에서는 황후가 아니면 그냥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는 것. 애시당초 당대 반정부 인사들, 혁명가들, 독일의 공통적인 선전이 ''''어둠의 세력(Тёмная сила)'이 러시아 제국을 배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라스푸틴은 물론이고 독일계인 황후와 총리 시튜르메르가 독일 정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둥의 음모론은 모두 이것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만약 지난 3년 동안 권력의 행보를 기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여기서 어둠의 세력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는지 기억하길 것입니다. 이 대화들은 어리고 순진한 공상가들과 정치적 모험가들의 동맹을 만들었고 라스푸틴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러시아의 시대에 도달했나요? 무엇이 밝혀졌습니까? >러시아에 라스푸틴 전제정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라스푸틴 전제정은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새로운 끝없는 라스푸틴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라스푸틴은 프로토포포프로, 프로토포포프는 리티흐로 바뀔 뿐입니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1917년 2월 15일 국가두마 발언 中 게다가 바로 그 라스푸틴 국정농단 설을 퍼뜨리던 주역 중 하나인 케렌스키부터가 라스푸틴이 죽자마자 제2, 제3의 라스푸틴이 등장할 것이라고 태세전환을 함으로서 결국 라스푸틴 개인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무엇보다 제정 붕괴 이후 '전직 장관, 최고운영자 및 전쟁부와 해군부의 기타 고위 인사들의 불법 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 조사 위원회(Чрезвычайная следственная комиссия для расследования противозаконных по должности действий бывших министров, главноуправляющих и прочих высших должностных лиц как гражданского, так военного и морского ведомств)'가 창설되었으며, 당연히 전술한 황후나 총리의 독일 내통,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이 주요 조사 주제 중 하나였으나 결국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에게서 어떠한 '범죄적 요소(Состав преступления)'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렸다. 즉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라스푸틴 건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고 이미 백년 전에 결론 내린 사안이다. 케렌스키는 주러 영국 대사 뷰캐넌에게 니콜라이 2세와 그 아내에 대해 자신들이 제기한 의혹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고 밝혔으나, 훗날 뷰캐넌은 회고록에 라스푸틴 이야기를 사실인 양 그대로 실었다.[* 다만 케렌스키도 훗날 회고록에서 다시 라스푸틴 음모론을 언급하다가 또 부정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결국 니콜라이 2세가 무능했을지언정 러시아를 위해 희생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런 일관성 없는 평가는 비슷한 위치인 [[파벨 밀류코프]]나 [[알렉산드르 구츠코프]]에게서도 나오는 편인데 애시당초 그들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평가에는 정치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의 진심에 가까운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따라서 라스푸틴 건은 귀족들, 반정부 인사들, 혁명가들, 독일 선전에 의해 황제 일가를 공격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입증불가능한 음모론이나 유명인사들에게 따라다니는 스캔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보안국장을 지냈던 알렉세이 바실리예프(Алексей Тихонович Васильев)는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라스푸틴과 알고 있었으며 비밀리에 라스푸틴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는 라스푸틴 음모론을 [[피렌체 다이아몬드|프랑스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저주받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면서 이러한 설을 부정했다. >라스푸틴은 정치적 무대의 일선에 오른 적이 없으며 러시아의 왕좌와 제국의 기초를 흔들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밀려났다. 그 본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비록 자신의 죽음이 러시아를 멸망으로 이끌것이라 말했지만 자신이 악한 음모자들의 손 안에 있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라스푸틴을 허수아비로 만들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시베리아 사내를 통해서만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소문을 퍼트렸다. >---- >[[https://ru.wikipedia.org/wiki/%D0%92%D0%B0%D1%81%D0%B8%D0%BB%D1%8C%D0%B5%D0%B2,_%D0%90%D0%BB%D0%B5%D0%BA%D1%81%D0%B5%D0%B9_%D0%A2%D0%B8%D1%85%D0%BE%D0%BD%D0%BE%D0%B2%D0%B8%D1%87|알렉세이 바실리예프]][* Суриса Л. М. (ред), Политический сыск, борьба с террором. Будни охранного отделения (Directmedia, 2016), 578.] 애시당초 전통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내부적 정쟁이 치열한 국가로서 그 니콜라이 2세조차 귀족들에게 견제당하는 처지였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자유주의자들 상당수가 귀족들이었다. 애시당초 전제정이라는 게 봉건귀족들을 용납하지 않는 체제이다 보니,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귀족들과 치열한 정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세르게이 비테]]와 [[파벨 밀류코프]]조차 귀족들이 의회와 헌법으로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차라리 전제정을 고수하는 니콜라이 2세가 낫다고 평했을 정도다.],1905년에는 [[두마]]로 인해 외견적 입헌군주정[* 차르에게 의회해산권이 있었으나, 두마에서는 법안 거부권이 있었다. 즉 사실상 둘이 완전히 협력하거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게 아닌 이상 정상적인 입법활동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으로 전환된 러시아 제국을 공식 섭정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고, 정부 고위직도 아니고 그 러시아 정교회에서조차 자리가 없던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를 완벽하게 조종한다 할지라도 국정을 좌지우지하기란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